지난 2020년 노벨 화학상의 영예는 CRISPR-Cas9(크리스퍼-캐스나인) 유전자 가위 기술을 발견한 제니퍼 다우드나와 에마뉘엘 샤르팡티에에게 돌아갔습니다. CRISPR 유전자 가위는 효소를 활용해 유전체의 특정 DNA를 정확히 찾아 잘라내는 유전자 편집기술인데요, 유전질환의 치료, 신약개발, 동식물의 형질 개량 등에서 이용될 수 있는 엄청난 가치를 지닌 기술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CRISPR 기술에 대한 특허권 분쟁이 지난 2015년부터 진행되고 있었다고 합니다. 지지부진한 법정 싸움 끝에, 미국 특허상표국(USPTO)는 올 2월, CRISPR 기술을 둘러싼 특허분쟁 두 번째 라운드에서 다우드나 교수가 속한 UC 버클리 연구팀이 아닌 MIT-하버드 브로드연구소 펑장 교수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UC 버클리 연구팀이 CRISPR-Cas9을 이용해 유전자를 정밀 편집할 수 있는 방법을 최초로 고안하여 노벨상을 수상했지만 이 기술을 진핵세포에서 최초로 사용했음을 입증하는데는 실패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UC 버클리대 연구팀은 CRISPR-Cas9을 개발한 공로로 노벨상을 수상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로서는 그 기술의 특허권을 보장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번 판결을 통해 브로드연구소는 2014년 최초로 등록한 특허권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널리 이용되고 있는 CRISPR 기술에 대한 사용료 또한 확보하는 데에 유리한 위치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CRISPR 특허 분쟁은 어떻게 진행됐으며, 왜 노벨상 수상자가 특허권을 갖지 못한다는 판결이 나오게 된 것일까요?
노벨상 수상자가 특허를 갖지 못하게 된 이유
첫 번째 재판에 있어 가장 화두가 된 부분은 브로드연구소의 기술이 신규성이 있는 발명인지, 아니면 노벨상을 받은 UC 버클리 연구소의 기술에 편승한 것뿐인지 여부를 가르는 것이었습니다. 이 분쟁의 핵심은 진핵세포 적용 기술이었는데요, UC 버클리 측은 CRISPR 특허에 진핵세포를 명시하지 않은 데 반해 브로드연구소는 진핵세포의 유전자 편집에 대한 구체적인 기술을 특허로 청구했기 때문에 진핵세포 적용 기술을 먼저 개발했다는 UC 버클리 측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미국 특허심판원(PTAB)은 단순히 CRISPR-Cas9의 발명만으로는 통상의 기술자가 해당 기술을 진핵세포에 적용하기 어려우며, 브로드연구소의 연구가 특허를 받을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을 갖췄다고 판정했습니다.
이어진 항소심의 쟁점은 진핵세포 적용 기술을 누가 먼저 발명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UC 버클리 연구소는 2012년 3월 발표한 논문에서 이미 진핵세포 적용 기술을 명시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브로드연구소는 UC 버클리 연구팀의 발표 이전에 펑장 교수가 진핵세포 유전자 편집 기술을 이미 보유하고 있었다고 반박했습니다. 미국 특허심판원은 UC 버클리 연구진이 동물의 진핵세포에 CRISPR 유전자 가위를 사용하는데 실패했음을 발견했고, 따라서 UC 버클리의 연구가 특허의 자격을 갖춘 ‘명확하고 영구적’인 발명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CRISPR 유전자 가위를 둘러싼 뜨거운 특허 전쟁
그렇다면 CRISPR 유전자 편집 기술에 대한 특허 분쟁이 이같이 뜨거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CRISPR는 본래 박테리아가 자신을 공격하는 바이러스를 방어하기 위해 사용하는 면역체계입니다. 박테리아는 바이러스가 공격해올 때 바이러스의 DNA를 추적하는 RNA(gRNA)로 표적을 찾아내 가위 역할을 하는 절단효소인 Cas9 단백질로 그 DNA를 잘라내게 됩니다.
영상 출처: http://www.crisprtx.com/gene-editing/crispr-cas9
이를 바탕으로 다우드나와 샤르팡티에 교수는 박테리아의 면역 시스템과 같이 효소를 재구성해 프로그래밍 된 표적을 유전자 가위로 자르는 기술을 개발했습니다. DNA 염기서열을 정교하게 자르는 이 기술을 통해 유전자 정보를 더욱 쉽고 빠르고 정확하게 편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CRISPR-Cas9 기술은 유전자 가위라고 불리기도 하는데요, DNA에서 유전질환을 유발하는 특정한 부위의 염기를 잘라내 유전질환, 실명, 에이즈 등의 치료를 현실화할 것이란 기대가 커지고 있습니다. 질병치료 이외에도 알러지 유발 유전자를 제거해 알러지 걱정 없는 유전자 조작 식품을 만들거나 모기의 말라리아 유전자를 교정해 말라리아 감염병 위험을 없애도록 유전자를 변형할 수도 있습니다. 최근에는 돼지의 심장을 사람에게 이식하는 수술에 유전자 가위 기술이 동물 장기 이식 시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유전자를 차단하는데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이용될 수 있는 유전자 가위에 대한 기대감이 더욱 커지며 유전자 가위 분야의 세계 시장 규모는 더욱 급증할 전망입니다. 이같이 유망한 CRISPR 기술을 사용하기 위해 이미 UC 버클리 또는 브로드연구소와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하고 비용을 지급한 회사들도 상당수 있어 이번 재판 결과에 따라 특허를 다시 구매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기에, 이번 특허 분쟁이 그 어느때보다 뜨거웠던 것으로 보입니다.
CRISPR 특허 분쟁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까요?
현재로서는 CRISPR 유전자 가위 특허 분쟁에서 UC 버클리 연구진이 패배함에 따라 CRISPR 사용을 위한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한 회사들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우리나라 기업인 툴젠(ToolGen)과 글로벌 생명과학 회사 머크(Merck)의 시그마 알드리치(Sigma-Aldrich)도 유전자 가위기술에 대한 저촉심사를 신청하여 또다른 특허 분쟁이 진행 중인 상태인데요, 앞으로 CRISPR 특허 분쟁이 어떻게 전개되어 시장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귀추가 상당히 주목됩니다.
CRISPR 기술은 이미 다양한 분야에서 이용되고 있으며, Cas9 특허 이외에도 Cas13, Cas14, Casɸ, Cpf1 등 다양한 종류의 유전자 가위가 개발되고 있어 CRISPR 기술을 둘러싼 특허 및 라이선싱 시장은 더욱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힐 것으로 보입니다. 이번 CRISPR 특허 분쟁은 노벨상을 수상한 대학의 연구소나 대기업이라도 빠르고 정확하게 특허를 권리화하지 못했다면 그 기술의 주인이 되지 못할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였습니다. 파이특허는 앞으로도 주목할만한 IP 사건들을 소개하고 CRISPR 기술과 관련 특허 분쟁들에 대한 깊이있는 인사이트를 제공하도록 하겠습니다.